|
선운사
일시:2011년 7월17일
순례사찰:선운사/도설암내원궁/참당암

도솔산은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문화재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눈 내리는 한겨울에 붉은 꽃송이를 피워내는 선운사 동백꽃의 고아한 자태는 시인ㆍ묵객들의 예찬과 함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ㆍ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인근의 재력이 확보되었던 배경 등으로 미루어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루한 장마가 끝난 바로뒤라 햇빛은 장마에젖은 대지를 말리기 위해선지 그빛은 여느때보다 강하여
맨살을 밖에내놓지 못할정도로 햇님은 따갑게 빛을쏘아댔다,
성암사 다라니기도순례 신도님들은 이렇게 무더운 삼복더위도 아랑곳않고
땅바닥에 자복을펴고 질서있게 자리에 앉아 법회를 우리스님과 함께시작했다,
머리위에있는 연등은 언제부터 설치 했는지는 몰라도 마치 우리신도님들을 위해서 설치해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연등 덕분에 우리신도분들은 그늘밑에서 따가운 햇빛은 피하게되 다행이었다,
약2시간에걸쳐 에불문 부터시작하여 신묘장구대다라니경을 21독 독송하고
수많은경을 독송하고 나면 점심공양시간이 훌쩍넘어간다, 불야불야 점심공양을 급히하고 도솔암
으로향한다 ,도솔암 극락보존에서 지장보살님께 기도올리고 내원궁 참배하고 나서 참당암으로 향한다,
참당암은 도솔암에서 선운사 가는길 중간쯤에서 좌측으로 들어간다,
계곡을따라 한참가다보면 지형이평평하고 아늑한 참당암이 나타난다,
참당암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모시고 협시보살로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모셨고
죄를 뉘우치고 참회하는 도량으로 유명하다,























선운사주지 법만스님








선운사 대웅전 천장




396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