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차 다라니순례 지보사

2011. 6. 25. 22:16불교이야기/성암사 다라니108순례

                      지보사

일시:2011년 6월19일

소재지;경북 군위군 군위읍상곡리280번지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동북쪽에 해발 437m에 이르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 하나솟아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배를 띄운 것 같다고해서 선방산(船放山)이라 한다.
산 아래 극락리의 한 할머니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산에는 옛날부터 전해온전설(傳說)이 하나 있다고 한다. 옛날 지금의 선방산(船放山) 꼭대기에는 배를띄우고 놀 만큼 큰 못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왔던 당나라 장수들이 여기서뱃놀이를 즐기고는 바위를 던져 못을 메워버렸는데 이후로 못은 어떤 가뭄에도마르지 않는 옹달샘으로 바뀌어 지금도 샘이 솟는데, 그 이름을 장군 샘이라 한다는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전설(傳說)과 산 이름이일치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할 것이다.
이런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선방산(船放山)의 낮지도 높지도 않은 남쪽자락에자리하고 있는 지보사(持寶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은해사 말사(末寺)로신라 문무왕13년(673)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오는 천년고찰(千年古刹)이다.
예로부터 보물(寶物)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지보사(持寶寺)”라고 했다한다. 신라시대부터 전해온 청동향로(선방산에서 나는 단청의 물감에 쓰이는 오색흙을 꼽는 경우도 있다.)와 열 사람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큰 가마솥, 아무리갈아도 물만 부으면 처음모습으로 되돌아가 닳지 않는 맷돌 등 많은 보물이있었는데 임진왜란당시 소실되었다고 하고 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가져갔다고전할 뿐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1999년 대웅전 해체당시 나온 상량문에는 지보사의 '지(持)'가 '땅(地)'로 쓰여있어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 터 자체가 보물(寶物)이 아닌가 한다. 조선후기에서부터 근세까지 남아있는 여러 자료에서 “지보사(持寶寺)”,“지보암(持寶庵)”이란 사명(寺名)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도 지금보다 큰규모(規模)는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지보사(持寶寺)에 남아있는 보물(寶物)이라면 통일신라시대 때 축조되어 보물제682호로 지정된 지보사삼층석탑(持寶寺三層石塔 )과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추정되는 삼존불(三尊佛)만이 전한다.
일주문도 천왕문도 불이문도 없는 산길을 올라 좁다란 절 앞 계단에 서면 은행나무,벚나무 가지 사이로 누각(樓閣)이 경내로 들어서는 관문의 구실을 하는 문루인선방루(船放樓)이다. 1994년, 옛 모습대로 중수하여 단청을 올리지 않은 이 누각에오르면 눈 아래로 넓게 트인 산 아래를 보노라면 세속(世俗)에 찌든 답답한 가슴이절로 탁 트이는 것 같다. 비록 해인사 구광루 같이 크지도 않고, 부석사 안양루처럼화려하지도 않지만 잠시 속세를 떠난 재가수행자가 좌선(坐禪)을 하거나독서(讀書)를 하기에는 그저 그만일 뿐만 아니라 대웅전(大雄殿) 앞만 아니라면더운 여름날에는 늘어지게 낮잠이라도 청하고 싶은 생각이 절로 일어난다.
주지 행훈(行薰)스님에 따르면, 지보사(持寶寺)는 신도가 많지 않아 자체적으로불사(佛事)를 한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 도 없었는데 다행히 몇 해 전 정부의지원으로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한 대소 전각과 경내를 말끔하게 정리할 수있었다고 한다. 특히 대웅전은 200여 년 전 화재로 소실되자 임시로 다른 건물로이축하여 대웅전으로 사용하였는데 크기가 네댓 평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다행히불사(佛事)를 하면서 대웅전을 옛날 크기로 복원하고 금단청(金丹靑)을 올려장엄(莊嚴)하였다.
1942년 쓰인「지보암중수기」에는 "대웅전 서쪽에 노전 한 채가 있는데 그 터가조금 높고 건물의 높이도 대웅전보다 높다. 창건한 이가 어떤 다른 견해를지녔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안목 있는 사람들이 이를 보게 되면 대웅전이 더 낮아미안스런 생각이 없지 않았다. 올봄 장인을 시켜 일을 시키면서 대웅전보다 높은들보와 기둥을 잘라내어 낮추고, 썩고 상한 서까래와 기와를 갈아서 새롭게 하여 몇달 만에 일을 마쳤다. 만일 보수를 하더라도 법도(法道)에 맞지 않으면 다시 옛날로돌아갈 따름일 테니 살펴 마음에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기록이 보인다.
불가(佛家)의 금기사항 중의 금기사항은 다른 전각이 금당(金堂)보다 높아서는 아니되고, 부처님의 법(法)이 물러남이 없는 것처럼 대웅전(大雄殿)을 뒤로물러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종단(宗團)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던것은 모두 조계사 대웅전보다 뒤에 있는 총무원 건물이 더 높기 때문이라는 말이나온 것도 모두 이런 연유이다.
새로 불사(佛事)를 하면서 대웅전(大雄殿)보다 한단 아래 염화실을 배치하는 등이전의 “중건기”에서 말한 법도(法道)에 따라 지으매 선방산 자락에는 대웅전과선방루를 포함한 여러 채의 건물이 짜임새 있게 자리하였다.
지보사(持寶寺)에는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으로 1980년 9월 16일, 보물 제682호로지정된 지보사삼층석탑(持寶寺三層石塔 )이 자리하고 있다. 이 탑은 본래 산 너머극락사(極樂寺)란 절에 있었으나 극락사가 폐사되면서 군위읍내의 동부리 절 골로옮겼다가 다시 지보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통상적으로대웅전 앞뜰에 위치하는 탑(塔0과는 달리 지보사 삼층석탑은 대웅전에서 한 쪽진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탑 앞에 서면 왜소하다는 느낌이 가장 먼저 들 정도로 비록 규모는 작지만 빼어난조각 솜씨와 여러 가지 특색을 보이는 탑이다. 높이 4.2m이고 기단은 균열되고지리석(地履石) 1부가 없어졌으며 1층 옥개석과 2층 옥개석 일부가 파손되었으나,나머지는 비교적 양호하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을 올린 형식으로 상하기단 면석에팔부신중(八部神衆)과 12지상(十二支像)이 조각되어 있다. 상층기단 갑석과 1층옥신 사이의 별석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장식성이 가미되었다.하층기단 면석에는 2개의 우주, 1개의 탱주를 새기고 그 사이에 12지상을양각하였으나 마멸이 심하다. 3층 기단 면석에도 2개의 우주, 1개의 탱주 사이에팔부신중을 정교하게 양각하였다. 옥신은 우주를 모각하고 1층 옥신면석에는감실(龕室)을 새겼다. 옥개석받침은 4단, 고임은 2단으로 구성되었고, 상륜에는사각형 노반(露盤)이 남아 있다.
주차장 한 곁에는 “무염당(無染堂)”이라고 음각(陰刻)된 부도(浮圖)가 자리하고있다. 이 부도가 선종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의개조(開祖)이신 무염국사(無染國師)의 부도인지는 확실치 않다. 
지금도 충청북도 보령시 성주면 만수산(433m) 아래에는 성주사지가 남아 있다. 신라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성주사는 마곡보철로부터 남종 선맥을 받고당나라에서 귀국한 무염국사가 주석했던 곳으로 비록 임진왜란 이후 폐사되었지만그곳에는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朗慧和尙白月菩光塔碑)」가 남아 있다.「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朗慧和尙白月菩光塔碑)」는 당대의 지식인 고운최치원이 쓴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로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13세에출가하여 동방의 대보살로 칭송받았던 무염국사의 일생을 기록한 비(碑)이다.비(碑)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무염대사의 산문(山門)을 알지 못하면 일세(一世)에수치스럽게 생각했으며, 문도 2천여 명이 무염대사를 따랐고, 신라 헌강왕이국사(國師)의 열반지 신묘사에 사적비를 손수 지었다고 한다.
당시 무염국사(無染國師)께서 열반하셨다는 신묘사가 지금의 지보사와 동일한장소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아있는 부도로 미루어 볼 때 고승(高僧)이 머무르며수행하던 좋은 수행 처였기에 “지보사(地寶寺)”라고도 불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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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녹색연합>도 "뭇 생명을 위해 몸을 던지신 문수스님의 귀한 뜻을 기억하겠다"는 제목의 논평을 냈다. 이 단체는 "현재의 이명박 정부는 문수스님의 귀한 뜻을 기억하지 못한 채, 4대강사업으로 수많은 고귀한 생명이 목숨을 잃고 소중한 자연환경이 훼손되고 있음에도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며 "부정부패에 물든 정부, 서민이 아닌 재벌과 손잡는 정부임을 국민들에게 확인시켜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미군부대 캠프캐럴의 고엽제 매립 의혹으로 온 국민이 생명과 안전에 대해 불안감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이 때, 진실 규명보다는 미국과의 관계가 더 중요한 정부가 다시 한번 뭇 생명을 위해 몸을 던지신 문수스님의 귀한 뜻을 기억하길 바란다"며 "국민을 위해 더욱 노력하는 정부가 되어 줄 것"을 촉구했다.

   
▲ 문수스님 ⓒ불교닷컴

1963년 전북 완주군 봉동에서 태어난 문수스님은 1984년 법주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해 1986년 해인사에서 시현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통도사.두방사.해인사.묘관음사 등에서 20년간 수행했다. 1998년에는 중앙승가대학 총학생회장을 지내며 조계종 내부 갈등이 심각할 때 정화개혁회의에 참여했고, 졸업한 뒤에는 사찰로 돌아와 선방을 돌며 수행에 전념했다. 2006년부터 경북 청도 대산사 주지를 거쳐 2007년 경북 군위 지보사에 들어온 뒤 선방에 들어가 3년간 안거했다.

3년 동안의 수행을 마치고 문밖을 나선 문수 스님은 입적 며칠 전부터 주변 스님에게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비판하며 "내 몸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소신해야 겠다"는 내용의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5월 31일 오후 군위군 군위읍 사직리 위천 잠수교 앞 제방에서 "4대강사업 즉각 중단" 등의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몸을 불살라 소신공양했다.

한편, 문수스님소신공양선양사업회(준)와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준)는 지난 30일부터 6월 4일까지 '다시 생명평화의 길로'라는 주제로 문수스님 1주기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이 기간동안 매일 오후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성찰과 참회의 108배를 올리고 법안스님(불교사회연구소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를 초청해 '생명평화 대화마당'을 갖는다. 또, 6월 4일에는 조계사에서 1주기 추모음악회를, 6월 11일에는 회룡포에서 낙단보 마애불을 거쳐 지보사에 이르는 추모순례를 갖는다.

 

 

 

 

 

 

 

 

 

 

 

 

 

 

 

 

 

 

 

지보사 주지스님 인사말씀

 

 

 

 

 

 

 

 

경남불교대학 제24기 도반 기념사진

 

우리스님과함께하는 12호차 순례 기념사진

 

 

 

 

 

 산영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