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차 다라니순례 해남 대흥사(1)

2012. 12. 21. 22:24불교이야기/성암사 다라니108순례

                            대흥사

일시:2012년 11월18일

주소: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66번지

전화:061-534-5502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이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즉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넓은 산간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크게 남원과 북원그리고 별원의(표충사,대광명전,박물관) 3구역으로 나뉘어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남원 뒤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사명대사의 사당인 표충사 구역과 대광명전 구역이 있다. <글 대흥사 홈>

 일주문 [一柱門]

사역으로 들어가는 첫번째문으로서 대흥사 성역(聖域)의 문지방에 해당된다.
유선여관을 지나 구림리 숲길 끝자락에 있으며, 어칸에는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이라 편액하였다.
일주문은 그 이름에서와 같이 기둥 둘이 한 줄로 서서 지붕을 받치고 선 1칸짜리 건물이다. 1975년에 건립되었으며, 지붕을 제외한 콘크리트식 건물로 겹처마 다포식 팔작지붕이다. .
보통 기둥이 일자형으로 되어 있는데, 대흥사 일주문은 여섯개의 석주를 세개에 한묶음으로 되어있다.

 

 

 

 

부도전

부도전은 일주문을 막 지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다. 나지막한 담장 안에 다양한 모습을 갖춘 부도(浮屠)와 탑비(塔碑)가 모두 80여기(부도 54기와 탑비 27기 )에 이르고 있다. 부도의 배치는 일정한 간격을 두지 않고 3~4열을 이루고 있어 무질서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무질서 속에서 조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의 부도는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건립된 것이다.

 

부도와 탑비의 주인공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 대흥사를 중흥시키고 크게 빛낸 스님들로서,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풍담(楓潭)ㆍ취여(醉如)ㆍ월저(月渚)ㆍ설암(雪巖)ㆍ환성(喚惺)ㆍ호암(虎巖)ㆍ설봉(雪峯)ㆍ연담(蓮潭)ㆍ초의(草衣) 등의 대종사와, 만화(萬化)ㆍ연해(燕海)ㆍ영파(影波)ㆍ운담(雲潭)ㆍ벽담(碧潭)ㆍ완호(琓虎) 등의 대강사, 그밖에 고승대덕들의 부도이다.

부도와 비의 주인공들이 조선 중기 이후의 인물들인 만큼 부도와 비의 양식 또한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작품들처럼 세련되고 섬세함을 느낄 수는 없지만 정성을 들여 기품 있게 만들어져 있다.

 

특히 팔각원당형의 서산대사부도(西山大師浮屠)는 기단부와 상륜부의 독특한 장식과 옥개의 낙수면, 처마의 목조건물 모각은 이 시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수법으로 고려시대의 양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보물 제1347호로 지정된 서산대사 부도가 위치하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담장 밖으로 우뚝 솟아 있는 사적비는 그 크기와 규모만큼이나 당시 대흥사의 위상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17세기 말에서 19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상(崇尙)하는 세력과 절 분위기가 일치한 때문이다.


 

 

 

문수 동자님

 

보현동자님

 

 

 

 

 

 

대웅보전(大雄寶殿)
대흥사의 중심법전으로 대흥사 가람 북원에 자리한다. 심진교와 침계루, 대웅보전이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며, 여기서 직교하여 좌측에 대향각과 우측에 백설당이 중정을 형성하며 배치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으로 다포계 양식의 팔작건물이다. 건물은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여 평방을 얹었다.
공포는 다포로 내삼출목(內三出目)ㆍ외이출목(外二出目)을 주간마다 2구씩 공간포를 놓았으며, 건물 안팎으로 화려한 조각솜씨를 뽐내듯 처마 아래 촘촘히 배열되어 있다. 포의 형상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외부로 뻗은 쇠서 위에 연봉을 조각하였으며, 내부는 모양을 판형으로 만들어 운봉형(雲峰形)으로 단장하였다.

 

건물 전면은 주간 모두 2분합의 두툼한 빗살문을 달고 하부 2단을 구획하여 화려하게 수장된 안상문양과 태극문을 궁방에 치장하였다. 측면과 배면에는 중인방까지 막돌을 쌓아, 상부에 팔상도와 법당을 수호하는 사천왕도를 벽화로 장엄하고 있다.

 

 

 

 

 

 

 

 

 

 

침계루(枕溪樓)

북원의 출입문으로 남ㆍ북원을 가로지르는 계류 금당천(金塘川)에 면하여 자리한 2층 누각건물이다. 심진교를 지나 누 아래의 어칸 통로를 통해 중정으로 출입하며,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다.

 

주심포식 겹처마 맞배건물로 낮은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그 몸체를 구획지었다. 중층 누각건물로 하층은 돌담과 판장문으로 마감한 광으로 구성되며, 상층은 평면에 널마루를 깐 홀로 이루어진 강당류의 평면을 구성한다. 건물 외부는 대웅전을 향한 내벽을 제외하고 삼면을 판벽과 판문으로 처리하였으며, 어칸에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골기있는 필법의 ‘침계루(枕溪樓)’ 편액과 그 배면에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이라 쓴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공포는 이익공으로 내부기둥이 없는 오량가구를 구성하여 상부 서까래 사이로 회골이 드러나는 연등천장을 단장하고 있으며, 상하의 기둥을 서로 분리하여 상하층의 쓰임새를 구분짓고 있다. 건물은 30평의 규모로 상층에는 법고와 1587년명 범종ㆍ목어ㆍ운판 등 사물이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 측벽으로 감실형 틀 속에 금어 현암(玄菴)이 조성한 사천왕탱이 걸려 있다. 이외 대흥사의 사적과 내력을 알 수 있는 ‘대웅전중창상량문(大雄殿重創上樑文)’과 ‘중조성천불기(重造成天佛記)’ 등 24기의 현판과 시액이 침계루 사면에 걸려 있다.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대흥사 산신각과 청운당 사이에 서 있는 탑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 모신 사리탑이라 한다.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신라의 일반형 석탑이다.
아래·위층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처마가 두껍고 윗면은 경쾌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으로 몸돌로 보일만큼 큰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등이 올려져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 높이가 크게 줄었으나, 넓이는 거의 줄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수가 하나로 줄어들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4단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작품으로 추측된다.
대둔산 정상부근에 세워진 대흥사북미륵암삼층석탑(보물 제301호)과 함께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이 서남단 지방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67년 1월 보수공사 때 기단 안에서 높이 12cm의 동조여래좌상(銅造如來坐像) 1구(軀)가 발견된 바 있다.

 

 

 

 

 

 위,아래 그림은 기와장 그림입니다

 

 

대흥사 대웅전 부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