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차 다라니순례 안성 청룡사(2)

2013. 8. 8. 22:08불교이야기/성암사 다라니108순례

 일시:2013년7월21일

주소: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28 

1265년(고려 원종 6년)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으나 1364년(공민왕 13년)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절 안에는 대웅전(보물 824), 관음전, 관음청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 등이 보존되어 있다. 대웅전은 다포계의 팔작집으로 고려말 공민왕 때에 크게 중창하여 고려시대 건축의 원형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다.

법당 안에는 1674년(조선 현종 15년)에 만든 5톤 청동종이 있고, 큰 괘불이 있어 대웅전 앞에 괘불을 걸 돌지주까지 마련해 놓았다. 구불구불한 아름드리 나무를 껍질만 벗긴 채 본래의 나무결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세웠다.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원찰(願刹)이었다는 청룡사는 1900년대부터 등장한 남사당패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이들은 청룡사에서 겨울을 지낸 뒤 봄부터 가을까지 청룡사에서 준 신표를 들고 안성장터를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연희를 팔며 생활했다. 지금도 건너편에는 남사당마을이 남아 있다.

주변에 서운산, 칠장산, 미리내성지, 고삼저수지, 안성장, 삼일운동기념탑, 죽주산성 등의 관광지가 있다.

 

 

 

꼬리가 끝이없는 성암사 다라니순례단일행

뜨거운빛이 내리쬐는 한여름인데도 힘차게 청룡사를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대웅전입구 한쪽에 피어있 는연꽃

우리 다라니순례단 일행을 반기고 있습니다

 

오래된 고찰임을 증명하듯 한쪽 석가래가 내려앉아

통나무로 받히고있습니다

 

 

 보물 제824호. 대웅전은 다포계의 팔작지붕 집으로 고려말 공민왕 때에 크게 중창하여 고려시대 건축의 원형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시대인 1265년(원종 6)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청룡사의 본당으로, 그 후 공민왕 때 중건되었으며, 현건물은 조선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삼출목의 공포(栱包)를 짜고, 전면은 겹처마, 후면은 홑처마로 하였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하여 내부 가구(架構)가 전부 노출되었다. 또, 측면 기둥에서 대들보[大樑] 위에 걸쳐지는 충량(衝樑)이 3개씩 있어서 특이하다. 공포 쇠시리에는 연봉이 있어, 조선 후기의 건축기법을 보이며, 산미(山彌) 끝이 수직으로 잘린 첨차형(檐遮型) 건물이다

안성 청룡사 대웅전 [安城 靑龍寺 大雄殿] (두산백과)

 

 

 

 

 

 

 

 

 

 

청룡사 대웅전 기둥은 원래 나무 형태 그데로를 살렸다

 

 

 

 

소나기가 한줄금 쏱아 붓더니 연꽃이 물을 먹음었구만

 

 

 

 

 

괘불 을 걸 지주를 세워야 되는데 돌이 깨져서 우짤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 등이 보존되어 있다.

 

 

관음전 관세음보살님

 

 

 

금동불

2000년 3월 24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70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 불단(佛壇)의 왼쪽에 모셔져 있는 불상이다. 원래는 관음전(觀音殿)에 봉안되었던 것으로서, 최근에 '강희육십일년개정(康熙六十一年改正)'이라는 명기(銘記)가 있는 복장유물(腹臟遺物)이 발견됨으로써 강희(康熙) 61년, 즉 1722년(경종 2)보다 훨씬 이전에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고려시대의 조각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며 보관(寶冠)과 대좌(臺座)는 원래의 것이 아니지만,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할 뿐더러 전체적으로 단아한 느낌을 주는 이 불상은 도상(圖像)이나 조각 수법, 청동(靑銅)으로 제작한 점 등이 주목된다.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길상좌(吉祥坐)의 자세를 하였으며, 적당히 살이 있는 얼굴에 사실성이 깃들인 이목구비, 미간의 도톰한 백호(白毫) 등에서 풍부한 양감이 느껴지며, 높게 결발(結髮)한 보발(寶髮)과 목의 삼도(三道) 등이 단정하면서도 위엄 있어 보인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어깨까지 올려 엄지와 중지(中指)를 맞대고 외장(外掌)하고 있고, 왼손은 배 부분까지 올려 엄지와 중지(中指)를 맞대고 있는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다. 가슴에는 영락(瓔珞)이 장식되었으며, 양쪽 어깨 위로는 보발이 다섯 가닥씩 흘러내리고 있다.

법의(法衣)는 양쪽 어깨에서 깃처럼 한 번씩 접힌 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배 부분에서 큰 'W'자형 무늬를 그리면서 양쪽 무릎을 감싸고 발목 부분에 밀집되었다가 다시 부채꼴 모양으로 져 양쪽 무릎에 부드러운 곡선형 무늬가 생겼다.

청동으로 제작된 점, 보발의 표현 방식이나 얼굴과 신체의 사실성 및 단아한 분위기, 화려한 영락 등에서 고려 후기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신체가 장대해지고 고개를 앞으로 숙인 자세, 단순화된 영락장식 등으로 미루어 조선 초기인 15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447년 중수된 파계사(把溪寺)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 15세기 초에 조성된 양평(楊平) 용문사(龍門寺) 관음보살좌상(觀音菩薩坐像), 15세기 후반 작품인 대승사(大乘寺) 금동보살좌상(金銅菩薩坐像)과 함께 조선 초기 보살의 특징을 갖고 있으나 장륙사(莊陸寺) 불상과 파계사 불상에 비해 영락이 단순화된 점으로 보아 그보다는 조금 늦게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안성 청룡사 금동관음보살좌상 [安城靑龍寺金銅觀音菩薩坐像] (두산백과)

 

2000년 2월 15일 보물 제11-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의 주종장(鑄鐘匠) 사인이 1674년(현종 15)에 제작한 종으로,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瑞雲面) 청룡리(靑龍里) 청룡사(靑龍寺)에 보관되어 있다. 전체높이 129㎝, 밑지름 89㎝, 윗지름 56㎝, 두께 7.5㎝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인 종뉴는 힘차게 용틀임을 하는 용의 모습이며 그 옆에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다. 몸통[鐘身]은 안으로 약간 오므라든 형태이고 아래위에는 연화당초문을 정교하게 새겨 띠를 둘렀다. 어깨 부분의 상대(上帶)와 간격을 조금 두고 그 아래에는 9개의 돌기[乳頭]가 있는 네모난 유곽(乳廓) 4개가 사방에 배치되어 있고, 유곽 사이에는 연꽃 가지를 든 보살상위패(位牌)를 각각 하나씩 조각하였다.
 
종 전체에 검은 빛이 감돌고, 표현 수법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다. 전통적인 신라 범종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으며 17세기 범종 연구와 승장들의 사회상, 사원경제구조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다. 청룡사에서 소유 및 관리하며 예불의식 때 사용된다. 

안성 청룡사동종 [安城靑龍寺銅鐘] (두산백과)

 

 

입을벌리고있는 나라연금강

 

대웅전 양쪽 추녀 끝에 금강역사가 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있다. 사찰로 들어오는 모든 잡귀와 악귀를 물리치는 금강역사상은 대개 사찰의 대문격인 금강문에 있다. 금강문이 없는 사찰은 천왕문이 대문 역할을 대신하여 금강역사를 모시기도 하고 영광 불갑사처럼 금강역사상이 아닌 그림을 그려놓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처럼 아예 사천왕상도, 금강역사상도 없는 경우는 드문 편인데, 추녀 끝에 금강역사를 그려 넣음으로써 잡귀의 침입을 막고 부정을 다스리는 묘안을 짜낸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입을다물고있는 밀적금강

 

청룡사 사적비